건설 현장 소장, 20평 주말농장에서 인생의 기초 공사를 다시 배우다
1. 40년 콘크리트 인생, 은퇴 후 부드러운 흙을 만나다
평생을 거친 흙먼지와 차가운 콘크리트, 그리고 쇳소리가 진동하는 건설 현장에서 보냈습니다. 도면책을 펼쳐놓고 기술자들과 대형 건물을 지어 올렸던 저는, 은퇴 후 참으로 낯선 ‘새로운 현장’으로 출근하고 있습니다. 바로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련한 20평 남짓한 작은 주말농장입니다.
처음 아내의 권유로 삽과 괭이를 집어 들었을 때만 해도 “큰 평수의 땅을 포크레인으로 뒤집어엎던 사람인데, 이까짓 20평 텃밭 가꾸는 게 대수겠어?”라며 내심 농사를 가볍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막상 작업복을 입고 장화를 신은 채 밭에 들어선 순간, 저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설계도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농사는 결코 은퇴한 노인의 심심풀이 소일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40년 동안 해왔던 건설 현장의 공정과 소름 돋도록 닮아있는, 가장 정직하고 치열한 ‘생명의 기초 공사’였습니다.
2. 밭갈이와 돌 고르기: 모든 공정의 핵심은 ‘기초 지반 다지기’
건물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하고 오래 걸리는 작업이 바로 땅을 파고 암반을 부수어 기초 지반을 다지는 일입니다. 지반 공사가 부실하면 아무리 화려한 건물을 올려도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주말농장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씨앗을 뿌리기 전, 겨우내 얼어붙어 있던 딱딱한 흙을 괭이로 파 뒤집고, 흙 속에 숨어있는 크고 작은 돌멩이들을 솎아내는 작업이 농사의 첫 공정이었습니다. 쪼그려 앉아 호미질을 하다 보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오고 이마에는 금세 굵은 땀방울이 맺혔습니다. 돌을 다 골라낸 후에는 거름을 섞어 흙을 부드럽고 기름지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포크레인과 불도저가 단숨에 해치우던 토목 공사를 온전히 제 두 손의 악력과 허리힘으로 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고된 ‘밭의 기초 공사’를 대충 넘기면, 나중에 어떤 작물도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한다는 현장의 진리를 알기에 묵묵히 흙과 씨름했습니다.
3. 돌관공사가 통하지 않는 자연의 섭리: 기다림의 미학
건설 현장에서는 종종 공기(공사 기간)를 단축하기 위해 야간 작업까지 불사하며 밀어붙이는 이른바 ‘돌관공사(突貫工事)’를 하곤 합니다. 돈과 인력을 쏟아부으면 눈에 보이게 건물이 쑥쑥 올라가는 쾌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흙의 세계에서는 그 어떤 돌관공사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상추씨를 뿌리고 고추 모종을 심은 뒤, 빨리 자라라고 물을 흠뻑 주고 비료를 쏟아부어 봤자 싹이 트는 시간은 앞당겨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과한 욕심은 모종의 뿌리를 썩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콘크리트는 부어 넣으면 며칠 만에 단단하게 굳어 형태를 드러내지만, 농작물은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천천히 잔뿌리를 내리고 햇살과 바람의 허락을 받아야만 비로소 파란 싹을 틔워 올렸습니다. 리더의 독촉이 아닌, ‘자연의 시간표’에 순응하며 묵묵히 기다려주는 인내, 그것이 바로 주말농장이 제게 가르쳐준 두 번째 철학이었습니다.
4. 잡초와의 전쟁: 끊임없는 하자 보수 공사
작물들이 제법 자리를 잡고 푸른빛을 띠기 시작할 무렵, 예상치 못한 불청객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잡초’입니다. 제가 심은 작물보다 배는 빠르게 자라나 영양분을 빼앗아 먹는 잡초를 보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이는 마치 건물을 다 지어놓고 난 뒤 끊임없이 발생하는 ‘하자 보수 공사’와 같았습니다. 벽에 실금이 가거나 배관에 물이 새는 것을 방치하면 건물 전체의 수명이 줄어들듯, 밭의 잡초 역시 초기에 뿌리째 뽑아주지 않으면 금세 밭 전체를 점령해 버립니다. 저는 매주 주말마다 밭으로 출근해 땀을 뻘뻘 흘리며 잡초라는 이름의 하자를 꼼꼼히 보수했습니다. 건물을 짓는 것만큼이나 완공 후의 유지 보수가 중요하듯, 농사 역시 끊임없는 관심과 땀방울을 요구했습니다.
5. 가장 값진 수확: 흙이 선물한 부부 사이의 윤활유
땀방울이 모여 마침내 첫 수확의 날이 밝았습니다. 벌레가 먹어 듬성듬성 구멍이 나고 마트에서 파는 것처럼 매끈하지도 않았지만, 내 손으로 직접 길러낸 상추와 깻잎, 오이를 수확하는 기쁨은 몇 십억짜리 건물의 준공 검사를 통과했을 때보다 더 짜릿하고 뭉클했습니다.
흙이 묻은 채소들을 한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온 날, 은퇴 후 하루 종일 집에 있는 남편 때문에 묘한 눈치 싸움을 하던 아내의 얼굴에 모처럼 환한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아이고, 마트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연하고 맛있어 보이네. 고생했어요.”
그날 저녁, 제가 키운 상추에 밥을 얹고 쌈장을 듬뿍 찍어 아내와 마주 앉아 먹는 식탁에는 그동안의 서먹하고 무거웠던 공기 대신 따뜻한 온기가 감돌았습니다. 제가 밭에서 수확한 것은 단순한 채소가 아니라, 삐걱거리던 부부 관계를 부드럽게 이어주는 천연 윤활유였습니다. 이렇게 맛있는 상추쌈과 채소는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습니다.
6. 에필로그: 은퇴한 시니어들이여, 주말농장에서 흙을 밟으며 농사 한 번 지어보세요
40년 동안 지어 올린 수많은 건물은 언젠가 낡고 허물어지겠지만, 주말농장의 20평짜리 흙바닥에서 배운 이 겸손함과 기다림의 철학은 제 인생의 후반전을 튼튼하게 받쳐줄 것입니다.
혹시 저처럼 은퇴 후 갈 곳을 잃고 집안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허탈해하는 동년배 가장들이 계신가요? 그렇다면 당장 근처의 작은 주말농장을 알아보십시오. 화려했던 과거의 계급장과 무거운 가장의 짐은 잠시 내려놓고, 정직한 흙에 땀을 쏟아 보십시오. 흙은 땀 흘린 만큼 정직하게 보답하며, 우리네 팍팍해진 인생에 가장 신선하고 푸른 위로를 건네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