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여행이 만들어준 우리 부부의 힐링
40년 현장을 뒤로하고 마주한 아내와의 서먹한 공기
40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는 건설 현장의 야전 사령관이었다. 본사와 현장을 쉴 새 없이 오가며 일했고, 가족을 위한 헌신이라는 이름 아래 집은 그저 잠시 눈을 붙이는 임시 숙소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평생을 일만 하다가 마침내 은퇴를 맞이했을 때,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예상치 못한 서먹함이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출근할 곳이 없다는 허무함도 컸지만, 그보다 힘든 건 종일 집 안에서 마주쳐야 하는 아내와의 미묘한 감정이었다. 아내는 내가 집에 있으니 자신이 늘 해오던 생활 리듬을 빼앗겼다고 느끼는 듯했고, 나는 나대로 평생 헌신한 보상이 고작 눈칫밥인가 싶어 섭섭함이 밀려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케이블카를 고른 이유
어디를 갈까 고민이 많았다. 마지막으로 여행을 간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할 정도로 나는 무심한 남편이었다. 너무 먼 해외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젊은 시절처럼 배낭 메고 고생하는 여행은 아내도 나도 내키지 않았다. 그때 머릿속을 스친 곳이 설악산이었다.
설악산은 웅장한 비경을 자랑하지만 산세가 험해 등산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케이블카를 타면 얘기가 달라진다. 많이 걷지 않고도 설악의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으니,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은 우리 부부에게는 딱 맞는 선택이었다. 아내에게 조심스레 “설악산 가서 케이블카 타고 바람이나 좀 쐬고 올까?” 하고 물었을 때, 툭툭 던지던 아내의 시선이 아주 조금은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소공원에서 권금성까지, 케이블카 위에서 바라본 아내의 옆모습
설악산 케이블카 승강장은 소공원 주차장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다. 표를 끊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오래전 아이들 손을 잡고 어딘가를 기다리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케이블카에 몸을 싣자 발밑으로 울창한 수목이 펼쳐지고, 고도가 높아질수록 기암괴석과 울산바위의 위용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소공원에서 권금성 정상부까지 오르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펼쳐지는 풍경은 그 몇 배의 값어치가 있는 것 같았다.
곁에 앉은 아내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40년 전 수줍게 나와 가정을 꾸렸던 그 젊은 여인이 어느덧 머리칼에 서리가 내려앉은 중년의 여인이 되어 있었다. 그 세월 동안 혼자서 가정을 지키고 아이들을 키워내느라 얼마나 고단했을지, 아내의 마음에도 깊은 골이 패어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코끝이 찡해졌다. 권금성 정상에서 바라본 속초 앞바다는 맑고 넓었다.
비룡폭포 가는 길에서 녹아내린 우리 부부의 서운함
권금성을 둘러보고 케이블카를 타고 소공원으로 내려온 뒤, 우리는 비룡폭포 탐방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경사가 완만한 이 길은 체력이 부담스러운 시니어 부부도 천천히 걷기에 무리가 없었다.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탐방로는 울창한 나무 그늘 아래로 맑은 물소리가 함께해서, 걷는 내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비룡폭포에 도착해 쏟아지는 물줄기 앞에 나란히 섰다. 집 안에서 서로 날을 세우며 주고받았던 날카로운 말들이 그 물살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현장 일만 아는 무뚝뚝한 남편이랑 사느라 고생 많았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가슴으로 삼키며, 우리는 탐방로 입구 쪽 찻집에서 따뜻한 대추차 한 잔을 나누었다. 별다른 대화가 없어도, 설악의 맑은 공기와 폭포 소리가 우리 사이의 어색함을 채워주었다. 굳이 사과하거나 변명하지 않아도,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서먹했던 사이가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느린 여행이 좋은 이유
이번 설악산 여행을 통해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 은퇴 후 부부 관계를 돈독하게 만드는 데 대단한 이벤트가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케이블카로 권금성에 올라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고, 비룡폭포까지 나란히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내의 체력을 배려하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마주하고, 그동안 소홀했던 시간에 대해 조용히 곁을 지켜주는 것. 그것으로 충분했다.
소공원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성에 올랐다 내려온 뒤, 소공원에서 점심을 먹고 비룡폭포까지 천천히 걸으면서 사진도 찍고 다람쥐도 구경하는 이 코스는 시니어 부부에게도 부담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내와 속도를 맞추어 천천히 걷는 시간이 꽤 괜찮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