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 호조벌

300년 전 조선 최대중 하나인 토목 현장, 시흥 ‘호조벌’ 위를 걷는 건축 소장의 단상

휴일 아침, 아내와 반려견 여름이, 구름이와 함께 시흥 갯골생태공원을 걷는다. 끝없이 펼쳐진 너른 들판과 은빛으로 흔들리는 억새를 보고 있으면, 지난 40년 동안 무거운 안전모를 쓰고 매일같이 출근했던 거친 건설 현장의 기억들이 서서히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다. 시흥 호조벌 위를 걷는 이 평화로운 시간이 요즘 내게는 가장 큰 위로가 된다.

하지만 평생을 건설업에 몸담으며 수백억 대의 건물을 지어본 내 눈에는, 이 평화로운 시흥의 들판이 단순한 자연경관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내가 걷고 있는 이 땅은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조선시대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완성된 거대한 초대형 토목공사 현장이기 때문이다.

시흥 호조벌 — 300년 전 조선의 간척 대역사

이 드넓은 평야의 이름은 시흥 호조벌이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1721년 조선 경종 1년에 완공된 것으로 전해진다. 잦은 냉해와 홍수, 흉년이 거듭되며 굶주리는 백성들이 넘쳐나자, 국가 재정을 담당하던 관청인 호조 산하의 빈민 구제 기관인 진휼청이 발 벗고 나섰다고 한다. 백성들을 먹여 살릴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해 바다를 막는 거대한 간척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공사 구간은 지금의 시흥시 포동 걸뚝에서 하중동 돌장재에 이르는 약 720m 구간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완성된 호조방죽을 기준으로 갯벌은 점차 평야로 변해갔고, 최종적으로 약 150만 평에 달하는 드넓은 농경지가 조성되었다고 한다. 여의도 면적의 약 1.7배에 달하는 규모다. 정조 임금 시절의 기록인 일성록 1794년 11월 기사에도 인천과 안산 사이에 옛날 호조에서 만든 수백 석이 나오는 방죽 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시흥 호조벌이 얼마나 중요한 곡창지대로 기능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40년 건설 소장의 눈으로 본 시흥 호조벌

포크레인이나 덤프트럭, 레미콘 같은 중장비가 단 한 대도 없던 300년 전의 조선시대다. 오직 사람의 맨손과 지게, 그리고 돌과 흙만으로 거센 바닷물을 막아내는 둑을 쌓았다. 둑을 완성한 뒤에도 갯벌의 소금기를 빼내는 데 수년이 걸렸을 것이고, 장마철이면 논이 물에 잠기는 어려움도 반복해서 겪었을 것이다.

현대 건축 기술로도 바다를 막는 간척 사업은 엄청난 난이도가 있는 토목 공사다. 도면을 그리고, 지반을 조사하고, 장비를 동원하고, 콘크리트를 타설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평생을 건축 현장에서 도면과 씨름해 온 내 입장에서 1721년 시흥 호조벌 간척 사업을 상상해 보면, 그 옛날 선조들이 얼마나 처절하고 위대하게 자연과 맞서 싸웠을지 온몸으로 전해지는 것 같다. 도면도, 콘크리트도 없이 오직 굶주린 가족을 먹여 살리겠다는 백성들의 절박함과 끈기가 가장 튼튼한 철근 역할을 했을 것이다.

건설의 본질, 사람을 살리는 일

건설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높고 화려한 건물을 짓는 데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바람을 막아줄 따뜻한 공간을 만들고, 굶주림을 해결할 비옥한 땅을 개척하여 결국 사람을 살리는 일이 건설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300년 전, 굶주린 백성을 구하기 위해 갯벌을 막아 시흥 호조벌을 만든 선조들의 마음도 지금의 우리와 결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시흥 호조벌에서는 시흥의 특산미인 햇토미가 생산되고 있다. 서해안의 해풍과 비옥한 토양에서 자라 찰지고 구수한 맛이 일품인 고품질 쌀로, 예로부터 궁에 진상되었을 정도로 우수한 밥맛을 자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300년 전 선조들이 맨손으로 일궈낸 땅에서 지금도 쌀이 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시흥 호조벌을 걸으며

이제 나는 화려했던 회사의 직함을 내려놓고, 편안한 운동화 차림으로 선조들의 위대한 땀방울이 스며든 300년 전 토목 현장 위를 자주 걷고 있다. 수십 층짜리 건물을 거뜬히 올려내던 팽팽한 긴장감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시흥 호조벌의 넉넉함과 평화로움이 천천히 채워지고 있다. 이 땅을 걸을 때마다, 나는 다시 한번 건설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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