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부도 나던 날 큰 감동을 받았던 기억
40년 건설 현장을 기계설비소장으로 근무하다 지금은 은퇴한 삶을 살고 있는 건설맨
돌이켜보면 수많은 현장이 스쳐 지나갔지만, 지금도 또렷이 떠오르는 현장이 하나 있습니다. 1990년대 초, 전라도의 한 공사 현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시절 건설 경기는 엄청난 붐이 일어났었습니다. 현장마다 활기가 넘치고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일을 하고, 나는 책임자로서 하루하루 눈코 뜰 새 없이 돌아다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회사가 부도를 났다는 것이었습니다.
현장이 멈추는 것보다 더 가슴을 짓누른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매일 흙먼지를 마시며 묵묵히 일해온 우리 기술자들의 노임 3천만 원을 당장 줄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루벌이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돈인데, 회사가 부도가 났기 때문에 그 노임이 묶여버린 것이었습니다.
커피 한 잔의 인연이 건넨 손
앞길이 막막해진 나는 습관처럼 현장 앞 단골 커피숍 문을 열었습니다. 2년 가까이 드나들던 곳이었지만, 마담과 깊은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저 커피 한 잔 마시고 가는 곳이었습니다.
텅 빈 가슴으로 창밖만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데, 마담이 조심스레 다가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괜찮다고 넘겼겠지만, 그날은 답답한 심정이었고 또 우리회사가 부도 난 것이 알려져 있었기에 입이 열렸습니다. 기술자들 노임이 묶여 눈앞이 캄캄하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마담은 말없이 듣더니 한마디를 꺼냈습니다.
“제가 그 돈 3천만 원, 빌려드릴게요.”
담보도 없고, 보증인도 없었습니다. 2년 동안 현장에서 흙먼지를 묻히고 들어와 조용히 커피를 마시던 내 모습 하나만을 믿고 내놓은 말이었습니다. 순간 귀를 의심했습니다.
은행 입구에서 멈춰 선 이유
마담과 함께 은행으로 걸어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습니다.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겠지만, 깊은 속사정 한 번 나눠본 적 없는 분의 피 같은 돈을 덥석 받는 것이 과연 사람으로서 할 일인가 하는 생각이 계속 걸렸습니다.
은행 입구에 다다랐을 때, 나는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러나 그 따뜻한 마음만 받겠소.”
마담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나는 마담의 마음이 고마워 은행 근처 식당으로 데려가서 소주 한 잔을 마주했습니다. 그깟 커피 몇 잔 인연이 전부인 나를 믿고 전 재산을 내어주려 한 그 마음이 너무도 고마워, 소주잔을 쥔 손이 떨렸습니다. 그날의 소주가 내 평생 가장 달고 따뜻한 술이었던 것 같습니다.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현장 소장의 도리
그 온기에 힘을 얻어, 나는 염치를 내려놓고 친척들 문을 두드렸습니다. 이 집 저 집 찾아다니며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돈을 융통했습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결국 기술자들의 밀린 노임을 십 원 한 장 빠짐없이 모두 챙겨줄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도 오랜 시간을 현장에서 보내며 500억 규모 회사의 부사장직까지 올랐고, 크고 작은 위기도 적지 않게 넘겼습니다. 하지만 지금껏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어떤 직책이나 숫자가 아닙니다. 그날 은행 앞에서 발길을 돌렸던 양심과, 어떻게든 일꾼들 노임을 챙겼던 뚝심입니다.
인생은 결국 사람이 짓는 공사
세월이 흘러 돌이켜보면, 그 커피숍 마담이 내게 내민 것은 신용과 믿음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를 신용있는 사람으로 믿어주는 마담의 온기가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그게 3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건물은 설계도대로 짓지만, 인생은 결국 사람이 짓는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각박한 세상이라도 진심은 통하고, 그 진심이 쌓여 삶의 희망이 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는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